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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락 박사 (1931년 ThD/신학박사), 달라스신학교 첫 한국인 졸업생의 이야기

참조: 한국어 기사에는 영어 원문에 없는 내용이 괄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Disclaimer: The Korean article contains some content in parentheses that is not found in the original English version.

1931년, 김성락 목사님은 달라스신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은 첫 한국인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와 신학 교육은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지만, 김 목사님께서는 학문과 사역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깊이 있는 신학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학위 취득을 넘어, 이후 세대의 한국인 신학생과 목회자들에게 길을 열어준 역사적 발자취로 남아 있습니다.

2024년, 달라스신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여러 이벤트가 열리던 해,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한국 동문들이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모여, 로잔대회 참석을 위해 방문하는 신학교 교수진 및 스태프의 일정에 맞추어 인천에서 동문 모임을 계획한 것입니다. 한국 졸업생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었습니다. 달라스에서 함께 보낸 시절을 회상하던 중, 한 졸업생이 20여 년 전 발간된 동창회 명부의 사진을 공유했습니다.


그 명부의 첫 페이지에는 의미 있는 이름들이 있었는데, 그중 제1호 졸업생의 이름은 김성락(영문 표기: Sung Nak 또는 Shungnak Kim)이었습니다. 고(故) 김성락 목사님은 1931년에 신학박사(ThD)를 취득한 달라스신학교 첫 한국인 졸업생이었으며, 당시 학교 명칭은 ‘달라스신학교’가 아닌 ‘복음신학대학’(Evangelical Theological College, ETC)이었습니다. [당시까지 많은 한국인들이 제1호 졸업생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및 안양대학교를 설립한 고 김치선 박사님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치선 박사님보다 7년 앞서 졸업하신 김성락 목사님의 존재는 매우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발견에 영감을 받은 한 동문이 달라스신학교 도서관 자료실 사서에게 문의했고, 사서는 이 초기 졸업생의 생애를 담은 귀중한 문서들을 찾아 보내 주었습니다. 그 자료 중에는 1930년 겨울, 김성락 목사님이 당시 교무처장이자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Lewis Sperry Chafer) 초대학장의 형이었던 롤린 토머스 체이퍼(Rollin Thomas Chafer)에게 보낸 입학 문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체이퍼 박사님께,

아마도 올해 제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궁금해하실 것 같습니다. 지난번 편지를 드린 이후로, 저는 이번 달까지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은 뉴헤이븐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예일대학교에서 몇 과목을 수강했습니다. 이번 2학기부터 복음신학대학(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College)에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곳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올해는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학기부터 저를 학생으로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능한 한 빨리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편지나 전보로 회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제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을 따라 일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진심을 담아,
김성락 드림

이 서신은 김성락 목사가 달라스신학교에 오게 된 배경을 조금이나마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며, 어떻게 복음신학대학(ETC)에 오게 되었을까요?


김성락 목사는 1910년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하고 1945년까지 식민 지배를 이어가던 시기의 일본 식민지 국민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은 1907년 평양대부흥 이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 평양이었으며, 그는 이곳에서 1897년 선교사 W. M. 베어드가 세운 기독교 중등 교육기관인 숭실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학교는 후에 ‘유니온 기독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일본 식민 당국이 공식 인가한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이 되었습니다. 김 목사는 이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그리고 같은 학교의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혹은 평양신학교로 더 잘 알려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미국 유학은 그곳에서 가르치던 선교사들의 권유로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숭실학교가 미국 장로교가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에, 유학의 첫 행선지로 장로교가 설립한 프린스턴신학교에 진학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1929년, 그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를 마친 뒤, 복음신학대학(ETC)에서 계속해서 학문을 이어 갔습니다.

Kim's 1937 Visa Document
김성락 목사의 1937년 미국 이민 비자 사진
Kim's Application to ETC
김성락 목사의 복음신학대학(ETC) 지원서류; 1930년 7월자로 “합격”이라고 기재됨

김성락 목사가 이미 신학석사(ThM)를 마친 프린스턴신학교나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었던 예일대학교가 아닌 복음신학대학(ETC)에서 계속 학문을 이어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체이퍼 형제 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드러납니다. 프린스턴신학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 박사 과정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30년 7월, 롤린 체이퍼 교무처장은 동생 루이스 체이퍼 학장에게 김 목사의 지원서와 그 배경에 대해 논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루,

김성락 학생의 서류 이야기를 해보지. 프린스턴에서 이미 그에게 신학석사(Th.M.)를 수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아. 그들도 이미 학위를 줬으니, 우리가 학위를 준다고 해서 문제 삼을 수는 없겠지. 프린스턴의 그룹(성적 등급) 제도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성적 중 상당 비율이 3그룹과 4그룹에 속해 있더군. 내 생각에는 1그룹이 가장 높은 성적으로, 우리 식으로 치면 A나 A+, 2그룹은 B나 B+, 3그룹은 C나 C+, 4그룹은 D나 D+ 정도일 걸세. 성적 체계에 대해서는 위크(Wick)가 잘 설명해 줄거야.
그는 프린스턴에서 박사 예과로 2년을 채웠고, 예일에서 1년 중 일부를 수료했으니 거주 요건은 이미 충족됐어. 내 생각엔, 논문만 제출하고 너의 지도 아래 특별 수업을 들으면서 성경 강해 수업에 최대한 참여한다면, 우리 쪽에서 신학박사(Th.D.)를 수여해도 무방해. 논문 계획을 몰라서 올해 요람에는 이름을 넣지 않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닐 것 같아. 졸업식 기록은 다음 해 요람에서 수정하면 될 테니까.

사랑을 담아, 2 2 3,
RTC.

이 편지는 체이퍼 형제가 김성락 학생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신학박사(Th.D.) 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또한 놀랍게도 김 목사는 복음신학대학(ETC)에서 단 한 학기만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특별한 특혜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 목사가 캠퍼스에 도착한 직후, 루이스 체이퍼 학장은 롤린 체이퍼 교무처장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친애하는 롤린,

김성락 학생의 학점 자료를 모두 동봉했어. 김 학생은 어젯밤 도착해서 오늘 아침에 숙소를 배정받고 있어. 보아하니, 글로버 박사의 시간표를 그대로 복사해서 주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어. 그런데 그게 딱 들어맞을 뿐 아니라 꽤 만족스러운 것 같아. 김 학생은 프린스턴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고, 그 위에 프린스턴에서 1년을 더 공부했으며, 올해 가을 학기는 예일에서 보냈지. 봄 학기에 여기서 필요한 과정을 이수한다면, 비록 논문을 완성하지는 못하더라도 졸업식 때 학위를 받을 만큼 학점이 충분할 것 같아. 그의 경우 서두르는 사정은 글로버 박사의 경우만큼이나 타당해. 김성락 학생은 내년 가을 본인 고국의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기회를 잡을 수 있는데, 여름과 가을까지 여기에 남는다면 그 사역이 1년 연기되거나 아예 무산될 수도 있어. 만약 그에게 이런 혜택을 주려면, 글로버 박사 때와 마찬가지로 교수회의에서 특별 표결을 거쳐 이 특권을 허락해야 할 거야.
언제나 당신의 동생,

그리하여 1931년 5월, 김성락 목사는 세 명의 다른 수여자들과 함께 복음신학대학(ETC)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그 외에도 3명이 수료증을, 6명이 신학사(Th.B.)를, 4명이 신학석사(Th.M.)를 받았습니다. 편지에서 논의된 대로, 김 목사는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의 특별 지도 아래 단 한 학기 만에 ‘성령론’(Pneumatology)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완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졸업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캐나다 매니토바 주 위니펙 (Winnipeg, Manitoba, Canada)출신의 또 다른 유학생인 ‘글로버 박사’의 바로 아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31 Graduate Class Photo
1931년 ETC 졸업생 일동; 김성락 목사는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1931년 졸업식 회보. 김목사의 이름이 Doctor of Theology 아래에 표기됨
Seung Lak Kim’s Registration Record
김성락 목사가 우수한 성적으로 ETC수업을 수료했음을 보여주는 성적증명서

김성락 목사를 둘러싼 이 한 세기 전의 기록들은, 그가 다른 어떤 선택지보다도 복음신학대학(ETC)에 진학하려는 깊은 결의를 품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ETC 지원서에서 김 목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질문 12: 당신 스스로 아는 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 그 뜻을 행할 의지가 있습니까?
김 목사의 답변: 예, 그래서 저는 고향을 떠나 멀리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질문 19: 목회 훈련을 위해 달라스 복음신학대학을 고려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 목사의 답변: 저는 당신들의 방법(성경 교리/이론)을 알고 싶습니다.

복음신학대학, [현 달라스 신학교]는 김 목사의 인생 여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준비한다는 그의 부르심이 이곳에서 [한국 최초 신학박사라는] 결실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 학위의 수여는 김 목사의 학문적 역량을 믿었던 교무처장 롤린 체이퍼와, 그의 박사 논문을 지도한 학장 루이스 체이퍼—두 형제의 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수여한 이 학위는 훗날 한국 교회의 미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 김성락 목사는 평양으로 돌아가 모교인 평양신학교(훗날 숭실대학교)에서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신학교수로 재임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황민화 정책과 함께 신사참배를 더욱 강력히 강요하자, 이를 거부한 학교는 1938년 폐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 미국에서 목회 제의를 받은] 김 목사는 아내와 네 자녀와 함께 한국을 떠나 이번에는 이민자의 신분으로 1937년 미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1907년에 설립된 미국 본토 두 번째 한인 이민 교회이자, [현재까지 존재하는] 로스앤젤레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1937~1958)가 되었습니다.

김성락 목사의 여권사진; 아내 윤 여사와 네 자녀가 함께 찍혀 있음
1938년 완공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사진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김성락 목사의 20주년 근속을 축하하는 기념 사진

이후 광복의 기쁨과 6·25 전쟁의 참화를 겪은 대한민국에 1954년 숭실대학교가 재건되었고, 김성락 박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재건된 모교의 제2대 총장(1958~1964)으로 부임했습니다. [그 후 김성락 박사는 가족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 다시 목회를 이어갔으며, 1977년 미국에 설립된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미주장신대, 현 California Prestige University)의 초대 총장으로도 사역했습니다.]


1981년 그는 북한 주석 김일성의 초청을 받아, 목회자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김성락 목사와 같은 숭실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평양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김 목사는 성경 200권을 가지고 가서 [김일성 주석에게 교회를 설립할 것을 권고하였고,] 이 성경책들은 오늘날까지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두 교회인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김 목사는 이후 1989년 소천할 때까지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며,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사역했습니다.

Reverend Kim meeting with Kim Il-Sung
1981년 평양에서 김성락 목사와 김일성 주석이 마주하는 장면

김성락 목사가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개교 7년 만에 최초의 유학생 중 한 명이자 아시아 대륙 출신 최초의 졸업생으로 학업을 마친 사실은, 달라스신학교가 창립 초기부터 하나님의 세계 선교 사명에 헌신해 왔음을 강력하게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지구 반대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평양 출신 학생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학위를 수여한 롤린 체이퍼와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 두 형제의 은혜에 대한 간증이기도 합니다. 두 형제는 프린스턴에서 온 성적표 한 장에 결코 다 담길 수 없는 그의 부르심과 가능성을 보았고, 그가 자신의 사명을 위해 준비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해 주었습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달라스신학교가 여전히 하나님의 세계 선교 사명을 이어 가는 가운데, 우리는 이 첫 번째 한국인 졸업생의 유산을 다시 발견하고 기릴 수 있는 뜻깊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평양에서 달라스로 향했던 김성락 목사의 용기 있는 여정은 그의 조국 교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습니다. 놀랍게도, 김 목사를 통해 달라스신학교는 일제강점기 한국 신학교육의 초기 발전, 전쟁 이후 남한 기독교 고등교육의 재건, 미국 내 한인 이민교회의 설립,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 북한에서 최초로 공식 인정받은 교회의 설립에 기여했습니다. 이 유산을 기억하며, 두 개의 한국이 다시 하나로 통일되고, 둘로 나뉜 교회가 다시금 연합될 수 있도록 달라스신학교 모든 구성원이 함께 한반도를 위해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기사에 사용된 사진은 댈러스 신학교 도서관 아카이브와 남가주대학교 디지털 도서관에서 제공되었습니다.

About the Contributors

Ahrum Yoo

Ahrum Yoo is a PhD student in Old Testament at Dallas Theological Seminary, where she also earned her ThM. After receiving the Lord’s call, she served as a missionary and was later led to pursue theological education. Prior to ministry, she studied economics and public policy and worked as a management consultant in Japan and Korea. Ahrum’s vision is to bring sound, Bible-based theology to the mission field. She is also passionate about connecting Old Testament theology with public issues such as governance, justice, and ethics. Ahrum is married to Davis, and together they have five children.